영혼의 산책

교회는 은혜와 평강의 공동체다


(교회는 은혜와 평강의 공동체다)


바울이 교회에 보내는 편지들에 항상 쓰는 말이 “은혜와 평강”이다.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있을지어다”(살전 1:1) 


바울은 데살로니가 교회 뿐만아니라 로마서, 고린도전후서, 갈라디아서, 에베소서, 빌립보서, 골로새서 등 모든 교회에게 “은혜와 평강이 있기를 원한다”고 편지했고, 개인에게 보냈던 서신서인 디도서와 빌레몬서에도 “은혜와 평강”을 빌었다.


이것은 모든 교회에는 반드시 “은혜와 평강”에 있어야 하고, 교회의 가치는 “은혜와 평강”으로 나타남을 의미한다.


교회는 교인 수를 자랑하거나 풍부한 재정이나 웅장한 건물을 자랑하는 곳이 아니다. 많은 숫자가 모이고 재정이 크게 늘고 교회 건물이 좋으면 그게 좋은 교회라고 생각하고, 그걸 교회의 목표로 삼는 경우가 있다.


물론 교회는 성장하고 부흥해야 한다. 인적 자원과 물적 자원이 늘어서 교회의 사역을 감당하는 데 어려움이 없이 풍족하고, 널찍하고 자유롭게 사용할 수 있는 건물이 있으면 얼마나 좋겠는가! 하지만 그것이 교회의 목표는 아니다.


교인 수도 많고 재정도 풍족하고 건물도 좋은데 은혜와 평강이 없다면 어찌 될까? 은혜와 평강이 사라진 교회라면 그 많은 숫자와 재정과 건물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은혜와 평강이 없다면 그러한 것들은 세속적인 욕망으로 변질될 수 있다.


교회에서 들려오는 추문 중에 나름 큰교회라고 하는 교회들이 서로 다투고 분열하고 시끄럽다. 두 패로, 세 패로 갈라서 싸우고 용역을 동원하고 폭력을 행사하기도 한다.


왜 이런 일들이 일어나는 것인가? 


은혜와 평강을 잃어버린 교회가 되었기 때문이다. 은혜와 평강 보다 세속적인 욕심으로 변질된 것에 목표를 두었기 때문이다. 하나님께 받은 은혜와 평강을 자랑해야 하는데, 눈에 보이는 겉모습을 자랑하기 때문이다.


교회는 무엇보다 하나님의 은혜로 충만해야 한다. 하나님의 은혜를 갈망하고, 하나님의 은혜가 풍성한 교회가 되어야 한다. 예배에 은혜가 있어야 하고 설교에 은혜가 있어야 하고 사역에 은혜가 있어야 한다.그래서 누구든지 은혜에 목마른 자들이 교회에 오면 은혜의 강물을 마실 수 있어야 한다. 그리고 그때 비로소 평강이 임하게 된다. 


은혜를 뒤따라 오는 것이 평강이다. 은혜와 평강은 언제나 한 쌍으로 연결되어 있다. 즉, 은혜가 있으면 평강이 있고 은혜가 임해야 평강도 임한다. 은혜가 없는 평강은 상상살 수 없다.


다윗이 지은 시편 중에 가장 유명한 시편은 23편이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그가 나를 푸른 풀밭에 누이시며 쉴만한 물가로 인도하시는도다 내 영혼을 소생시키시고 의의 길로 인도하시는도다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 주께서 내 원수의 목전에서 내게 상을 차려 주시고 기름을 내 머리에 부으셨으니 내 잔이 넘치나이다”


읽기만 해도 평화가 절로 떠오르는 시편이다. 그런데 이때 다윗이 처한 상황은 결코 평화로운 때가 아니었다. 사울의 칼날을 피해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다닐 때였다. 사울이 다윗 한 사람을 잡겠다고 3천 명의 군대를 동원했다. 다윗이 어떻게 평화로울 수가 있을까? 마음 편히 잠이나 잘 수 있었을까? 


그런데 다윗은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그가 나를 푸른 풀밭에 누이시며 쉴만한 물가로 인도하시는도다”라며 평강을 노래할 수 있었다. 왜? 하나님의 은혜를 누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비록 사울을 피해 사망의 음침한 골자기를 다닐지라도 주께서 함께 하시는 은혜,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안위하시는 은혜를 누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또 두려움에 죽을 것만 같은 때에도 그의 영혼을 소생시키시고 의의 길로 인도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누렸기 때문이고, 원수의 목전에서도 그의 잔이 넘칠 정도로 부으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누렸기 때문이다.


나는 우리 교회도 은혜와 평강이 충만한 교회가 되기를 원한다.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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